경기헤드뉴스 최보영 기자 | 빠르게 확장된 도시 판교 한복판, 느린 시간을 건네는 식당이 있다. ‘하루(HARU)’라는 단출한 이름을 내건 이곳은, 단지 소바를 파는 곳이 아니다. 음식을 통해 흐름을 설계하고, 손끝의 리듬으로 공간의 온도를 만들어가는 장소다. 이곳을 이끄는 이는 ‘소바 장인’으로 불리는 정준모 셰프다. 일본에서 요리를 수학한 그는 오랫동안 소바 하나에 천착해 왔고, 그 장인정신은 식사라는 일상의 장면을 한 끼의 수행으로 바꾸어 놓는다.
정준모 셰프, 장인정신으로 이어온 단일한 길
정 셰프는 용인 동백에서 소바와 덴푸라로 이미 마니아층을 형성한 인물이다. 국내에서도 보기 드물게 메밀 제분부터 제면, 숙성, 온도 조절까지 전 과정을 손으로 다루는 ‘쇼쿠닌(職人)’의 정신을 지닌 조리인이다. 그는 최근 판교로 자리를 옮겨, 보다 정제된 공간에서 자신의 조리 철학을 더 넓은 손님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하루의 공간은 오픈 키친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의 노렌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일본의 소바집에 들어선 듯 정숙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조명은 과하지 않고, 주방에서는 불필요한 소음 없이 칼질과 면 뽑는 소리가 중심이 된다. 이 모든 배경은 오직 음식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흐름을 중심으로 한 식사의 미학
이날 점심 오마카세 코스는 메뉴판 없이, 셰프가 구성한 흐름대로 이어졌다. 시작은 검은 소쿠리에 담긴 여섯 가지 전채 요리였다. 닭근위 소금구이는 고소한 지방과 쫄깃한 식감의 균형이 좋았고, 아귀간(안키모)은 절제된 간장 소스와 어우러져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직접 만든 깨두부, 감자 샐러드, 마무침과 해초초무침 등은 입 안의 온도를 천천히 조율하며 다음을 준비시킨다.
이어 나온 스이모노는 닭완자와 표고, 목이버섯, 팽이 등이 들어간 맑은 국물 요리였다. 조용하지만 깊은 다시 향이 바탕을 이루며, 단순한 국물이 아니라 하나의 정중한 전환점처럼 느껴졌다.
튀김은 새우, 표고버섯, 고구마, 붕장어 순으로 하나씩 타이밍 맞춰 제공되었다. 말차 소금이 함께 제공되며, 각 재료의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화를 이뤘다. 튀김옷은 얇고 과하지 않아 기름짐 없이 담백했고, 특히 붕장어의 경우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 이상적인 밸런스를 보여줬다.

사시미는 줄무늬 전갱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정확한 어종을 모두 식별하기는 어려웠지만 껍질을 살짝 그을리거나 숙성 방식을 달리한 구성에서 셰프의 섬세한 감각이 드러났다.

하루의 중심, 자가제면 소바
이날 식사의 정점은 단연 소바였다. 셰프가 매일 직접 메밀을 제분하고, 손으로 면을 뽑아내는 ‘자가제면’의 정수. 면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쯔유는 짠맛보다 감칠맛을 앞세운다. 무즙, 파, 와사비를 곁들여 조절할 수 있으며, 면과 국물 사이의 조율을 손님 각자가 완성하도록 여백을 남겨둔다.
메밀 본연의 향과 씹히는 질감이 살아 있으며, 식사의 마무리로서 전혀 무게감이 없으면서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이 한 그릇만으로도 셰프가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디저트로 나온 와라비모찌는 과한 단맛 없이 콩가루의 고소함과 쫀득한 질감이 인상적이다. 여운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주는 정결한 피날레였다.
다시 찾고 싶은, 정중한 하루
이곳 하루는 화려한 구성이나 극적인 요리 대신, 긴장과 집중의 리듬을 내세운다. 셰프 정준모는 자신의 조리 철학을 통해 음식의 흐름을 설계하고, 한 끼의 식사에 온전한 시간을 부여한다.
과하지 않게 정제된 공간과 단정한 동선, 정확하게 조리된 각 구성은 하루라는 이름처럼 오늘 하루의 ‘온전함’을 지향한다.
판교라는 도시의 속도 안에서, 하루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여백 같은 공간이다. 미식은 입보다 마음의 온도를 바꾸는 일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하루는 조용하지만 깊은 경험을 선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