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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무용의 창시자, 불세출의 코리안 댄서 ‘최승희’

반도의 무희 ‘최승희’가 꿈 꾼 우리 춤의 세계화

경기헤드뉴스 성미연 기자 |

 

▲ 최승희와 용인의 관련성

 

춤은 인간의 육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다. 또 음악과 미술, 사람의 몸이 한데 어우러진 종합예술이기도 하다. 시인 예이츠가 발레리나의 춤을 보고 감동 어린 시를 지었던 것처럼 무용은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예술 장르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무용은 전근대 시대까지만 해도 기생들의 전유물이었다. 기방(妓房)에서 술자리와 함께 반드시 동반되던 것이 무용(춤)이었다. 물론 궁중 제례나 연회에도 무용이 쓰이긴 했지만 광범위한 무용 문화는 기방(妓房)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전근대인들의 무용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단순히 연회 자리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것으로만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무용에 대한 인식을 일소하고 한국적인 무용 문화를 만들어낸 여인이 바로 최승희(崔承喜, 1911~1969)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우리가 현재 당연히 한국 전통무용이라 생각하는 근대 한국무용은 없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문화가 고사(枯死)되고 있을 때, 당당히 코리안 댄서라는 이름을 달고 해외에서 한국무용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인물이다. 그녀의 무용 예술은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양권은 물론 미국, 유럽, 남미 등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고 예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처럼 근대 한국무용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무용의 세계 전파자이기도 한 최승희가 용인과 깊이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승희가 21살 때인 1931년 5월 9일 안막과 결혼을 하면서 안막의 본적지인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에 적을 두었다.

안막의 본명은 안필승이고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을 주창하는 카프 문학의 맹장으로서, 원래는 경기도 안성 출생이지만 어릴 때 아버지의 형제인 안창선의 양자로 가게 되면서 본적지가 용인으로 바뀐 것이다.

 

 

최승희의 출생지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이지만 1931년 안막과 결혼하여 1937년 까지 약 6년 동안 처인구 원삼면에 적을 두었고, 이 곳에서 딸 안승자를 낳았는데, 최승희가 일본, 중국, 유럽, 남미 등 세계적인 무용수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할 때였다.

당시 최승희가 시집 와 살았던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417-2번지에는 옛 건축물이 노화된 채 아직 남아있다. 일부 기둥이 뒤틀리고 벽이 무너진 상태지만 전체적인 건물 구조는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최승희의 옛집 자체만으로도 근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따라서 본지의 기획특집을 통해 그녀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해 보면서 지역문화 컨텐츠 개발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 스승과의 운명적인 만남

 

 

최승희는 집안의 막내로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좋고 성적이 우수하여 소학교를 4년 만에 졸업했다. 숙명 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는데 집안 경제 사정이 나빴으나 성적이 우수하여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음악학교와 경성사범학교의 진학을 희망했으나 나이 미달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경성일보에 근무하던 오빠 최승일이 여동생 최승희의 재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터라 경성일보에 보도된 이시이 바쿠의 한국공연을 주목하게 된다. 이시이 바쿠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26년 3월 21일로, 이 날은 한국에서 기생들이 추는 무용이 아닌 무용수가 추는 무용을 처음으로 선보인 날이었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신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이 경성일보 주최로 경성공예당에서 열린 것이다.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를 데리고 공연을 보러 갔다. 어린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관람하면서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다. 그 때의 공연 내용은 ‘산에 오르다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무용이었는데, 이 공연을 보면서 최승희는 자신도 무용수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갖게 되었고, 그런 심정을 오빠 최승일에게 털어 놓는다.

최승희의 고백을 들은 최승일은 바로 이시이 바쿠의 분장실로 데리고 가 동생이 무용을 하고 싶어 하니 가르쳐 볼 생각이 없느냐며 제안을 했고, 이시이 바쿠는 어린 최승희의 빼어난 몸매와 아름다운 용모에 매료되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3년간 무용을 배우는 조건으로 경성일보 사장인 마스보까의 보증으로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연구생이 된다.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16세로 이시이 바쿠의 다른 연구생과는 다르게 연구소에서 침식하는 이른바 ‘스미고미(すみこみ)’제자로 무용을 배우게 된다. 월사금과 식비를 못 내는 대신 청소와 세탁, 공연이 있으면 의상 손질 등을 하면서도 연습 시간은 물론 자유시간에도 쉼 없이 연습했고 밤잠을 아껴가며 예술 서적 탐구와 영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의 역량을 알아 본 이시이 바쿠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어지면서 점차 유능한 무용수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시이 바쿠 연구소에 온 지 석 달 만에 동경 호가구좌에서 춤을 추었고, 한 달 뒤 희비야 공회당에 출연하여 처음으로 일본 ‘야마토 신문(やまとしんぶん、1886~1945 はっこう)’ 에 최승희에 관한 기사가 실리게 된다.

 

 

그러다가 최승희는 1927년 10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연하게 되는데 1927년 9월 27일 자 매일신보에서 최승희가 한국에 돌아와 공연한다는 기사가 실린다. 당시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 한국인 무용수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화제거리였다. 1927년 10월 25일과 26일에 걸쳐 경성공예단에서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단원으로 최승희는 최초로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특히, 이시이의 배려로 ‘세레나데’를 솔로로 추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국내 언론들이 최승희의 성공적인 첫 출발을 알리는 격려와 함께 ‘조선의 꽃’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이 날 공연은 모교인 숙명여고가 후원하였고 관객은 대만원을 이룬 가운데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공연 후 우미관에서 앙코르 공연까지 했다.

동경으로 돌아간 최승희는 1928년 신년 초에 매일신보에 기고한 논설에서 “새해에는 더욱 분발하여 우리나라에 시가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무용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동지를 구하여 우리 사회에 무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고, 조선일보에는 “우리나라 여성을 아름답게 발육시키고 아름다운 조선 여자의 춤을 창작하겠다”는 다짐을 기고했다.

이렇게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서 보낸 3년 동안 최승희는 무용가로서 뿐만 아니라 창작인으로도 무섭게 성장했다.

19세 되던 1929년, 최승희는 오빠 최승일과 약속한 3년의 무용 생활을 마치고 9월 8일 경성으로 돌아온다.

 

▲ 근대 한국무용 예술을 개척하다.

 

 

1929년 경성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오빠들의 도움으로 남산 기슭에 ‘최승희 무용예술연구소’를 개설하게 되는데 한국인 최초의 무용단이 조직된 것이다. 최승희는 연구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는데 연구생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15명이 들어왔다. 김은숙, 김정애, 조정애, 장기성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발표회가 시작되면서 최승희의 화려한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바로 한국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무대 위에서의 무용 예술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 이전까지 모든 사람은 공연장이 아닌 술집에나 가서야 춤을 볼 수 있었지만, 무용수로서 예술로서 무용을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이때 한국무용 <영산춤>을 처음으로 공연했다.

1930년 2월 1일 제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가 열렸다. 악성 루머에도 불구하고 발표회는 성황을 이루었고 경성과 지방을 돌면서 공연은 계속되었다. 같은 해 10월 제2회 발표회를 가졌고 이듬해인 1931년 1월 제3회 발표회를 개최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공연은 모두 성공적이었으나 명성만큼 공연수입만으로는 무용연구소나 창작비용은 턱 없이 부족했으며, 일제의 압박이 날로 심해져 연구소의 사정은 날로 어려워졌다. 최승희 후원회도 결성되었지만 그녀의 예술보다는 얼굴이나 육체를 탐내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어 최승희는 결혼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오빠 최승일은 최승희의 무용을 깊이 이해하고 도와 줄 사람을 찾게 되는데 친구 박영희의 중매로 후배 안막을 소개했다. 문학과 무용에 조예가 깊었던 두 사람은 얼마간의 연애 끝에 결혼한다. 1931년 5월 9일 조촐한 결혼식이 행해졌고 그 때 최승희 나이 21세였다. 그 해 9월 1일 제4회 최승희 무용발표회가 열렸다. 그러나 안막이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면서 관객이 현저히 줄게 되었고, 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공연허가를 내주지 않기도 했다.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형성되지 못하고 오히려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자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견디지 못해 늑막염에 걸리고 만다.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던 최승희는 지병이 어느 정도 호전되자 1933년 3월 4일 딸 승자와 제자 김민자를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일본에는 스승인 이시이 바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자신의 무용의 끼를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던 터라 한국에서의 힘든 활동은 잠시 접고 싶었을 것이란 심정도 이해할 만하다. 더욱이 당시 남편 안막이 유학 차 일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최승희 부부가 일본 생활을 시작한 이때부터 최승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곧 최승희가 세계적인 무용수로 발돋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 첫 번째는 무엇보다도 남편 안막이 문단 활동을 접고 최승희의 무용 매니저 역할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을 논함에 있어서 안막의 문학적 감수성의 결합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절대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명고수(名鼓手)이자 명무(名舞)였던 한성준을 만나 정통 조선 춤을 전수 받았다는 것이다. 사실 최승희는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 춤에 그렇게 열정을 가지지 않았는데 마침 방송 관계로 동경에 온 한성준의 공연을 본 것이 최승희로서는 조선 춤을 무대에서 처음 접한 것으로 이 때부터 조선 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한성준에게 전통춤을 전수 받은 최승희는 그 해 5월 20일 여류 무용대회에 출전하여 ‘에헤라 노아라’등의 조선무용을 선보여 ‘무서운 신인’이라는 칭송과 함께 그녀의 이미지를 널리 알렸고 1934년 9월 20일 동경에서 제1회 최승희 신작 무용발표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세 번째는 ‘반도의 무희’라는 무용영화에 출연한 것이었다. 극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최승희로서는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기회였던 만큼 영화를 통해 최승희를 세상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고, 유례없이 4년 동안이나 장기 상영되었다.

1936년에 최승희는 비로서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에서 공연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반도의 무희’가 상영되면서 많은 팬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해 9월 22일에는 제3회 최승희 신작 무용발표회를 열어 한국무용가로서 그의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면서 오빠 최승일이 ‘최승희 자서전’을 출판하게 된다.

‘코리안 댄서’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최승희....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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