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헤드뉴스 최보영 기자 |
서울 양재천 뒷골목, 화려함 대신 단단한 감각이 숨어 있는 공간이 있다.
익숙한 건물과 거리 안쪽에서 문득 발견되는 식당 ‘엘쁠라또(El Plato)’는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맛을 통해 기억에 남는 집이다.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게 좋은 음식을 내놓는 이곳은 황재원 셰프가 중심에 선다.
엘쁠라또의 메뉴는 본질적으로는 스페인 요리를 기반에 두고 있지만, 전형적인 타파스 바의 분위기와는 결이 다르다. 그보다는 요리를 ‘차례대로 흐르게’ 만든 이의 손길이 느껴지는 구성이다.
식사는 재료의 조합과 조리의 타이밍, 테이블 위 분위기까지 포함해 마치 “어떤 대화”처럼 흘러간다.

연어의 말끔함으로 문을 열다
첫 접시는 연어 타르타르 스타일의 전채 요리.
고운 색감의 연어가 얇게 슬라이스되어 부드럽게 입 안을 감싸고, 산뜻한 크림과 감귤 계열의 향이 가볍게 균형을 잡아준다.
가볍게 시작하되, 심심하지 않은 질감과 맛. 시작부터 식사의 리듬이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로메인, 계란, 하몽이 주는 따뜻한 온기
두 번째 접시는 구운 로메인이었다.
그 옆에는 반숙 계란과 하몽이 서로를 느슨하게 지지해주는 듯한 구성.
불맛을 머금은 채소와 하몽의 깊이, 그리고 노른자의 유연함이 식사의 분위기를 본격적으로 전환시킨다.
한 끼 식사에 온도감이 실린다면 아마 이런 방식일 것이다.

해산물 세비체 – 풍미의 중심
식사의 중심은 단연 세비체다.
신선한 해산물과 상큼한 소스, 얇게 슬라이스된 채소들이 미묘하게 산도와 감칠맛을 밀고 당긴다.
가볍게만 흐를 것 같던 식사가 이 지점에서 진지하게 방향을 튼다.
한 입 넣자마자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 그 느낌을 정확히 건드리는 요리였다.

빠에야, 그리고 황재원 셰프의 페르소나
마무리는 빠에야(Paella).
그러나 그 익숙한 이름과 달리, 이 빠에야는 쌀알의 결, 육수의 깊이, 해산물의 배합, 조리 타이밍들을 섬세하게 계산된 완성도로 담고 있었다.
겉은 바삭하게 눌렸고, 안쪽은 부드러웠으며 과하지 않은 염도와 진득한 풍미가 인상 깊다.
바삭한 누릉지의 층이 씹힐 때, 이 식사를 설계한 사람의 성격까지 그려지는 듯했다.
말을 걸어오는 요리
엘쁠라또의 요리들은 각각의 이름보다는 ‘맛의 결’로 기억되는 음식이다.
메뉴판의 언어보다는, 접시에 담긴 철학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방을 지키고 있는 황재원 셰프의 일관된 태도가 있다.
과시하지 않고, 매뉴얼처럼 만들지 않는다.
한 접시 한 접시마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방식으로 완성해낸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 셰프의 요리는, 이 골목의 풍경마저 바꾼다.
엘쁠라또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선 음식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그 말을 진심으로 듣고 싶은 날, 양재천 뒷골목 이 조용한 공간을 다시 찾게 된다.
